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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성지2

예부터 나무와 억새가 많았던 새남터 성당 – 소개, 기념관, 마치며 소개‘새남터’는 나무와 억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이곳에 나무와 억새가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까지 말 그대로 울창한 숲이었습니다. 한자로 음역하여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합니다. 조선 시대 때는 군사들의 연무장이었고, 대역죄인들, 국사범을 처형하던 곳이었습니다. 대표 예는,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을 들 수 있는데, 세조 2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 여섯 신하가 여기에서 처형되었습니다. 4대 박해 동안 천주교 교우들이 순교로 주님을 증거 한 영광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분들의 순교로 한반도에 찬란한 신앙의 꽃이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4대 박해 동안 순교한 성직자는 모두 열네 분입니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분이 이곳에서 순교하셨습니다. 1984.. 2024. 12. 2.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시절 그곳, 절두산 성지– 유래, 안내, 유해실, 성지 사용 문의, 순례 추천코스, 결론 유래조선 시대 절두산은 교통의 요지였고 흉년에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던 진휼, 병사들이 훈련했던 장소, 제사를 지내던 곳, 양화진 동쪽 봉우리입니다. 원래 가을 두, 누에의 머리 형상이어서 잠두봉이라 불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천주교도가 참수형으로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로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안내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는데, 이때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 신부가 조선을 탈출, 청나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로즈 제독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 조선에 침입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 교전 후 1866년 10월 23일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했습니다. 그 이유는 9월에.. 2024.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