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당
나주성당 안에 있는 순교자 기념 경당은 나주에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춘화 베드로와 1872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강영원 바오로, 유문보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네 분의 믿음과 삶을 기리고자 세운 무덤 경당입니다.
네 분의 믿음과 삶
1. 이춘화 베드로
공주 태생으로 나주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33세 때인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읍내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2. 강영원 바오로
충청도 홍산 태생입니다. 부모가 홍산에서 순교한 뒤 전북 용담으로 이사했다가 정읍으로 갔습니다. 1871년 11월 23일 정읍에서 체포되었고 나주로 압송되었습니다. 체포 당시 강영원은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어떤 아전이 버선을 벗어 그에게 주려고 하자, 포악한 포교가 버선을 칼로 찢으려다 그의 발바닥을 벴습니다. 포교의 이러한 행패는 나주까지 가는 동안 계속됐지만 강영원은 이를 참아냈습니다. 나주 진영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유문보와 유치성음 만나 신앙을 북돋우면서 서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강영원은 나주 무학당, 군사 훈련장이요 형장이었던 곳으로 끌려가 백지 사형당했습니다. 1872년 4월 16일, 강영원의 나이 50이었습니다.
3. 유문보 바오로
전남 나주 출신입니다. 옥구, 장성으로 이주해 살다 장성에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전라도 영광, 충청도 남포로 이주했다가, 장성 삭별리에 정착하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871년 신미년에 장성에서 동료가 밀고하여 체포되고 나주로 압송되었습니다. 옥에서 강영원과 유치성을 만나게 되었고, 영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영장이 "이후에도 천주 신앙을 믿겠느냐?"고 묻자 "만 번 죽더라도 천주 신앙을 믿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타고 진물이 흘렀으나 하느님을 향한 신앙에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혹독한 고초를 받고 병들었습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에서 1872년 3월 20일과 4월 16일 사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유문보 나이 60이었습니다.
4. 유치성 안드레아
경상도에서 태어나 1827년 정해 박해 때 부모가 체포되어 충청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이후 현재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전라도 무장의 암티점으로 이주해 살았습니다. 1871년 회장 소임을 맡아 활동하던 중 신미 박해로 다음 해 1월 2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나주 옥사에서 유문보, 강영원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만 번을 죽더라도 천주 신앙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유치성은 강영원과 함께 나주 무학당으로 끌려가 백지 사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유치성 나이 47세였습니다.
박해와 나주
전남지방에는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나주에서 가까운 강진, 무안, 영광, 함평까지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나주 진영 관할구역인 나주, 정읍, 무장, 장성에 천주교 신앙인이 많이 거주했습니다. 그래서 나주에서도 많은 사람이 순교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록에는 나주에서 순교한 네 분만 확인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 지방 행정중심지는 전주였습니다. 전주에는 감영이 있었습니다. 전라남도 지방에서 체포된 교우들은 대부분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고 그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라남도에 순교지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기타
백지 사형이란? 1866년 병인박해 때 잡혀 온 천주교 신자가 많아지자 사용하기 시작한 사형 방법입니다. 법전에 수록되지 않은, 가리지 않고 함부로 처형한다는 남형인데 비밀리에 이용했습니다. 죄인의 손을 뒤로 묶은 후 상투를 풀어 그 끝을 묶인 손에 다시 묶은 뒤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한지를 거듭 붙여 숨이 막혀 죽게 하는 잔인한 방법입니다.
헨리 대주교 기념관
순교자 기념 경당이 있는 나주성당 안에는 초대 주임이자 광주대교구 제5대 교구장을 역임한 현 하롤드 헨리 대주교 기념관이 있습니다. 나주성당 뒤편 언덕에 있는 기념관에는 현 대주교의 행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현 대주교는 사제 생활 43년 중 38년을 한국에서 지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참고로 나주성당은 1935년,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한국에서 건립한 첫 성당입니다.
카리타스 수녀회 역사 기념관
나주성당 안에은 카리타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1956년 현 하롤드 대주교는 일본에서 수련 중인 우리나라 출신 수녀를 초청했습니다. 현재 나주성당 자리에 카리타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을 세우고 3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지금은 역사 기념관으로 복원해 초기 수도자들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 두었습니다.
무학당 주춧돌
무학당은 나주 진영 안에 있던 훈련과 관련한 군사시설이었습니다. 무학당은 참혹한 박해 시기에 많은 교우가 잔혹하게 고문당하고 장렬하게 순교했던 장소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치명 일기」에는 강영원, 유치성, 유문보 이곳에서 치명한 순교자 세 분에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07년에 나주초등학교 조성 공사를 할 때 무학당 주춧돌로 보이는 돌 12개를 발견했습니다. 그곳 현장에서 130여 년 동안 보존된 것입니다. 2001년에 그중 10개를 나주성당에 옮겨왔습니다. 그중 8개 주춧돌을 순교자들이 처형당했던 무학당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2개는 경당 주변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는 곳에 놓았습니다. 옮겨 오지 않은 2개는 나주초등학교 화단에 그대로 두고 옆에 순교 터 안내판을 세웠습니다.
마치며
우리는 지금 특정 신앙을 지녔다고 고문받거나 박해를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온전한 자유 의지로 신앙 생활을 하는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신앙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백지 사형과 같은 잔혹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부족한 우리입니다.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신앙도 더 깊어지고 자라나지 않을까요?
나주 성당 순교자 기념 경당에 들렸다가 근처 나주 목사(옛 사또 집)도 보시고, 홍어 좋아하시면 근처에 홍어집이 많으니 홍어와 나주 곰탕 한 그릇 드시지요. 자가용으로 가신다면 나주 배도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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