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한 한티 성지 교우촌 |
한티 성지 영성관 |
의의
한티 성지는 조정의 박해를 피해 살던 한티마을에서 수십 명의 신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 현장입니다. 한티에는 군데군데 교우들의 묘가 흩어져 있습니다. 언제부터 한티에 교우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인근 신나무 골과 비슷하게, 1815년 을해 박해와 1827년 정해 박해 후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하려고 마을에 와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떨어진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있습니다. 서쪽 가산과 남동쪽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있으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있습니다.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산골은 천혜의 은둔지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국에 많은 성지가 있으나 순교자들이 실제로 살고 순교하고 그 자리에 묻힌 후 지금까지 무덤이 그대로 전해오는 성지가 없는데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의미 있는 성지입니다. 박해가 심하면 교우들이 떠남으로써 대부분 교우촌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한티는 박해가 끝나거나 시작되면 교우들이 돌아온 곳입니다. 이곳에서 200년 동안 신앙의 숨결이 이어졌고, 무명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므로 한티는 천주교도들에게 마음의 안식처입니다.
교우촌
1837년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신나무 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 요아킴이 기해박해 때 신나무 골보다 더 깊은 산골인 한티에 와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집 모여 움막을 짓고 숯과 사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한티를 중심으로 인근 한밤, 서촌, 원당 사람들이 입교하면서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1850년대에 큰 교우촌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을해 박해와 정해 박해를 전후해, 임진왜란 때나 신유박해를 전후해 교우촌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도들은 낮에는 사기를 구어 옥바라지하거나 생계를 연명했고, 밤에는 인근 신나무 골이나 원당마을로 성사를 보러 다녔습니다.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밤새워 옮겨 다녔기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축지법을 쓴다.”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세상과 단절되어 살고 있던 한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은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입니다. 이들은 경신박해를 피해 신나무 골에서 한티로 피난 왔습니다. 이곳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현장에서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이선이 엘리사벳은 신나무 골로 옮겨졌습니다. 1845년에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와 1849년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를 순회 · 전교하면서 한티마을에 와서 판공성사를 집전했습니다. 1862년 배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마을 대단히 큰 산 중턱에 외딴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는 40여 명이 성사를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차례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마을은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이합니다. 3년간 유례없이 혹독했던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수십 명의 교우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습니다.
무명 순교자 묘지
한티 성지에는 무명 순교자가 가장 많이 묻혀 있습니다. 병인박해 동안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를 파헤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후 먼저 죽이고 나중에 보고하던 선참후계(先斬後啓)를 적용했는데 한티 교우촌에서 수없이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마을은 불탔습니다. 1868년경 봄 한티에 서울 포졸과 가산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을 체포했습니다. 배교자는 놓아주었고, 도망가는 자는 쫓아가 죽였습니다. 신앙을 지킨 공소회장 조 가롤로와 아내 최 바르바라와 동생 조아기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이때 순교자는 40여 명입니다. 포졸들과 병사들이 물러간 뒤 살아남은 교우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했습니다. 박해를 모면한 조 가를로의 아들 조영학 토마와 박만수 요셉이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공소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밭에 묻힌 이도 있고, 돌 더미에 묻힌 이도 있고. 산등성이에 묻힌 이도 있습니다.
현재, 한티 성지에는 피정 집과 영성관, 순례의 집이 있습니다. 피정의 집은 1991년 10월에 신자들의 영성 생활을 위한 건물로 지었습니다. 영성관은 2000년에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입생들이 1년간 공동생활을 할 집으로 지었고, 순례의 집은 2004년 12월에 성지를 찾은 순례객들이 미사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하려고 지었습니다.
마무리
해발 600미터에 자리한 한티는 지금도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주위에 다른 민가를 찾을 수 없는 외딴곳입니다. 박해 때, 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생겼지만 대부분 이름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한티에는 그런 무명 순교자 묘가 많은 곳입니다. 정성껏 복원해 놓은 옛 공소와 교우촌이 있고, 당시에 굽던 도자기 조각과 풀 한포기, 돌 하나, 나뭇가지에도 순교자들의 숨결이 살아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을 배울 수 있는 곳이지요. 9월 순교자 성월이 아니라도 주말이나 휴일, 여유 있는 시간에 가족이나 친구, 친목회나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방문해도 좋습니다.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5
대표전화 : 054) 975-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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