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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 순례

민주화의 성지 - 명동 성당, 성당의 우여곡절, 마무리

by 황금빛 이삭 2024.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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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성당

원래 명동 성당이 있는 언덕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었습니다. '명례방'이라 불렸던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전례를 행했던 곳입니다.

김범우 토마스는 자기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공소 예식을 드렸습니다. 포도청이 이를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했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받고 귀양 가다가 사망했습니다. 그 후 1886년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던,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때부터 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명동 성당입니다.

성당의 우여곡절

명동 성당은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성당을 지을 때 성당의 아래 왕실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永禧殿)이 있었기에 풍수상 곤란하다."라고 반대해서 건축이 늦어졌습니다. 또 성당을 짓는 기술자들이 대부분 중국에서 왔는데, 청일전쟁이 나자 기술자들이 중국으로 귀국해 버려서 또 건축이 늦어졌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쇠붙이나 생필품을 군수품으로 걷어갔는데 명동 성당 종탑 종도 공출당할 뻔했습니다. 이때는 천주교가 자발적으로 신자에게 금속품을 일제에 헌납하라고 장려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노기남 대주교는 종 치는 끈을 치우고 종탑을 폐쇄했습니다. 그래서 종은 무사했습니다. 대신 성당 제대 앞에 있던, 제단과 교우 석을 나누는 철제 분리대, 영성체 난간이 뜯겨 나갔습니다. 그 영성체 난간은 목재로 교체되었습니다. 현재도 그 목제 난간이 남아 있습니다.

6.25 전쟁 때는 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뻔했습니다. 전쟁 때 성당 근처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몰아내려고, 미군은 "명동 전체를 폭격한 뒤 성당을 새로 지어 주겠다'라고 한국 천주교에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에서 결사반대해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명동 성당은 1947, 1973, 2009년에 보수공사를 했습니다.

 

명동 성당을 떠올리면 첫 번째 떠오르는 점은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의 성지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1971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성탄 자정미사 강론, 1976 3.1 민주 구국 선언, 1987 5.18 7주기 추모 미사를 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 조작을 폭로, 6월 항쟁 때는 대학생 농성 단의 은신처가 되었고, 6월 항쟁 이후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미사들을 집전했습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고, 103위 시성식을 주례하려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교황은 행사 당일인 5 6일 대회장에 가기 전 오전에 명동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당 오른쪽에 있는 명례방 집회 성화,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김범우 토마스ㆍ이 벽 세례자 요한ㆍ이승훈 베드로 성화, 교황 방문 기념 부조를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제대 앞 장궤틀에서 무릎을 꿇고 한국 천주교회와 한민족을 위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명례방 집회 성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도 사목 방문차 한국을 찾았는데 일정 마지막에 명동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교황은 명동 성당 꼬스트홀에서 한국 종교 지도자들과 만난 후 성당에서 남북한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고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했습니다.

마무리

명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 상징이면서 우리나라 최초 본당입니다.

1892년 고종 29년에 착공하고, 1898년 광무 2년에 준공했습니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뿐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모태와도 같은 곳입니다.

명동 성당에서 꼭 들러 봐야 할 곳은 대성전 제단 아래쪽에 있는 지하 성당입니다. 이곳엔 19세기에 천주교 박해로 희생된 성인 유해 5위와 일반 순교자 유해 4위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성인 유해가 모셔진 명동 지하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