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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 순례

제주도 대정 성지 아름다운 신앙인 - 정난주 마리아, 아들 경한, 남편 황사영, 마무리

by 황금빛 이삭 2024.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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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묘소

정난주 마리아

정난주 마리아는 영조 491773년에 남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나주(羅州), 아버지는 정약현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은 정난주의 작은아버지들입니다. 정난주 가문은 조선 시대에 일찍 서학을 믿었고 정난주도 작은아버지 정약전을 통해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고모부인 이승훈에게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1791년 황사영 알렉시오와 결혼했습니다. 황사영과 정난주 가문은 친인척지간으로 매우 친밀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정난주는 시어머니와 함께 간난 아들 경한을 데리고 친정인 경기도 남양주 마재로 피신했습니다. 남편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提川) 배론 골짜기로 피신해 백서(帛書)를 써서 북경(北京)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이 일로 가산은 몰수되고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유배되고, 정난주는 제주도로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제주 대정현 관비(官碑)가 된 정난주는 대정현 토호 김석구 집에 위리안치되었는데, 김석구는 한때 별감이었습니다. 현감과는 막역지우로 자문역할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여서 동헌 바로 뒤에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정난주는 김석구 아들들을 양자처럼 기르며 았습니다. 또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을 교화시켰습니다. 183866, 대정현 노비로 37년 동안 고생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나이로 사망했는데 사람들이한양 할머니가 죽었다며 슬퍼했다고 전해집니다. 정난주는 대정읍 모슬봉 북쪽 한굴왓에 묻혔습니다. 아들 경한은 사망 후 예초리에 안장되었습니다. 제주도 천주교 교우들이 정난주 마리아를 기리며 무덤이 있는 대정성지와 예초리의 아들 경한의 무덤을 조성했습니다.

아들 경한

두 살짜리 아들 경한(景漢)은 어린 탓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 노비로 가게 되었습니다. 정난주 마리아가 유배를 가던 도중 추자도 예초리 바닷가 황새바위 갈대밭에 아들을 내려두고 떠났습니다. 아들 황경한을 마을에 살던 오상선 부부가 발견해 데려다 양자로 길렀으며, 현재 그 후손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추자도 황 씨는 모두 황경한의 자손입니다. 황경한을 키워준 인연으로 황 씨와 오 씨 두 집안은 한 형제의 의미로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정난주가 황경한에게 남겨준 족보를 1970년대 초반까지 보존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어린 후손이 장난으로 딱지를 만드는 바람에 훼손되었습니다.

남편 황사영

남편 황사영 알렉시오는 천재였습니다. 1790년 황사영 나이 16세 때 과거시험 중 하나인 진사시에서 급제했습니다. 22세에 생원시에 급제한 정약용보다 6살 어렸습니다. 최연소 장원급제로 역사에 남은 인물입니다. 이 천재를 정조가 불러 손목을 잡고“20세가 되거든 다시 오너라. 내가 너를 중히 쓰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정조가 잡은 손목에 명주 천을 감고 다녔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이 해에 그는 정약현의 딸 정난주(명련)와 혼인한 뒤 정 씨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791년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교리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낙민 루카와 함께 교리에 관해 더욱 깊이 연구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배론으로 피난해 숨어 지내면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하며 구원을 요청하는<백서>를 작성했습니다. 황사영은<백서>를 발송하기 직전에 능지처참 판결로 처형되어 순교했습니다.

마무리

대정성지는 다산 정약용 조카이자 제주 최초의 천주교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남편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받고자 백서를 작성해 청나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습니다. 부인 정난주도 제주로 유배되었습니다. 제주 관노로 전락했는데도 신앙심을 잃지 않고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에게 신앙을 알려 이웃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정난주 마리아가 세상을 뜨자 제주 주민들이 추모 공간을 마련했고, 훗날 천주교는 이곳을 대정성지로 꾸며 성지순례 장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남편을 잃고, 아들과 생이별한 큰 슬픔을 안은 정난주 마리아입니다.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아들들을 양자처럼 기르며 살았습니다. 또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을 교화시켰다고 전해집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예수님의 삶처럼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킨 분이었습니다. 제주에 가신다면 인적이 드문 성지이지만 꼭 들르셔서 아름다운 신앙인의 기운을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