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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적 고향 명례 성지 – 이런 곳입니다, 성지 시설, 마무리 이런 곳입니다.명례성지는 영남의 젖줄 낙동강이 바라다보이는 언덕,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에 있습니다.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이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입니다. 소금 장수였던 신석복 마르코가 이곳에서 출생했습니다. 신석복 마르코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대구 포졸들에게 붙잡혀 양력 3월 31일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습니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명례에서 진해와 웅천을 오가며 소금과 누룩을 팔았는데 살림이 넉넉했습니다. 그는 신앙을 지키려고 숨어 살던 신자들을 돕기도 하고, 천주교 실정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소금과 누룩을 파는 것이 생계 수단이었으나 박해 시대에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핑계 삼아 장사를 했을 것입니다.웅천 장터에서 돌아오다 나루터에서 포졸들에게 붙잡혀 대구로 압.. 2024. 12. 3.
한국 천주교 창설과 함께 시작된 전주 – 여는 말, 치명자산 성당, 전주 교구 순교 성인과 교우 촌, 치명자산 성지, 성직자 묘역, 닫는 말 여는 말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전주 지역의 천주교가 시작되었습니다. 1784년 가을, 전주 지역 양반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경기도 양근에 사는 권일신을 대부로 삼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후 귀향하여 호남 지방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1784년 겨울, 진산 양반인 윤지충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입교하고,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전주 지역 천주교는 전주와 현재 충남 지역인 진산을 중심으로 뿌리내렸습니다. 하지만 신해 박해, 신유박해, 정해 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마다 희생자가 끊이지 않아 전주 지역은 순교의 땅이 되었습니다. 치명자산 성당 안치명자산 성당성직자 묘역을 지나 해발 300m 산 정상에 오르면 바위 암벽 위에 세운 작은 성당이 보입니.. 2024. 12. 2.
수천만 억새가 반기는 곳, 천연 석굴 죽림굴 - 소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은신처이며 마지막 서한 발신지, 결론 소개천연 석굴인 죽림굴은 1986년 언양성당 김영곤 주임신부가 탐사 중에 발견했습니다. 간월 교우들과 충청도 일원, 영남 각 지역에서, 1839년 기해박해 이후 피난해 온 교우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당시 천주교인에게 인정사정없이 잔혹했던 관아의 손길을 피해 더 안전한 곳을 찾던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피난처입니다. 산 넘어 간월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신자 100여 명이 한꺼번에 불을 피울 수 없었습니다. 교우들은 이곳에 숨어 지내면서 연기를 내지 않으려고 곡식을 구유에 넣어 물에 불려 생식하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이 천연 석굴 대재 공소는 입구가 낮고 대나무와 풀로 덮여 있어 숨기에 적절했던 것입니다. 죽림굴 대재 공소는 폭 7m, 높이 .. 2024. 12. 2.
예부터 나무와 억새가 많았던 새남터 성당 – 소개, 기념관, 마치며 소개‘새남터’는 나무와 억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이곳에 나무와 억새가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까지 말 그대로 울창한 숲이었습니다. 한자로 음역하여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합니다. 조선 시대 때는 군사들의 연무장이었고, 대역죄인들, 국사범을 처형하던 곳이었습니다. 대표 예는,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을 들 수 있는데, 세조 2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 여섯 신하가 여기에서 처형되었습니다. 4대 박해 동안 천주교 교우들이 순교로 주님을 증거 한 영광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분들의 순교로 한반도에 찬란한 신앙의 꽃이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4대 박해 동안 순교한 성직자는 모두 열네 분입니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분이 이곳에서 순교하셨습니다. 1984.. 2024. 12. 2.
민주화의 성지 - 명동 성당, 성당의 우여곡절, 마무리 명동 성당원래 명동 성당이 있는 언덕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었습니다. '명례방'이라 불렸던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전례를 행했던 곳입니다.김범우 토마스는 자기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공소 예식을 드렸습니다. 포도청이 이를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했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받고 귀양 가다가 사망했습니다. 그 후 1886년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던,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때부터 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명동 성당입니다.성당의 우여곡절명동 성당은 우여곡절이 많습니다.성당을 지을 때 성당의 아래 왕실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永禧殿)이 있었기에 “풍수상 곤란하다."라고.. 2024. 12. 1.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시절 그곳, 절두산 성지– 유래, 안내, 유해실, 성지 사용 문의, 순례 추천코스, 결론 유래조선 시대 절두산은 교통의 요지였고 흉년에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던 진휼, 병사들이 훈련했던 장소, 제사를 지내던 곳, 양화진 동쪽 봉우리입니다. 원래 가을 두, 누에의 머리 형상이어서 잠두봉이라 불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천주교도가 참수형으로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로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안내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는데, 이때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 신부가 조선을 탈출, 청나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로즈 제독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 조선에 침입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 교전 후 1866년 10월 23일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했습니다. 그 이유는 9월에.. 2024. 12. 1.